[끝없는 월요일 – 4화] 자본가 계급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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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는 서양의 문화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수용하면서 일어났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신분제도가 폐지되기 시작하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개최되고 노비 해방을 결의, 시민운동을 해 나갔었지만 1899년 황실에 반역하는 단체로 몰리는 등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 했다고 한다. 이후, 일제시대에 먼저 서양화된 문물을 지닌 일본과 기타 외세의 영향을 받으면서 계급사회가 사라졌기에, 현대 사회의 사회계층을 이해하려면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french1부르주아지 ( Bourgeoisie) 란 자본가 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중세 시대 도시에서 생활하던 프랑스 시민들은 농사보다는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들이 대부분으로 “성 안에 사는 사람들” 이었다. 이들이 17~18세기 사유재산을 가지게 되면서, 왕이나 귀족들의 무분별한 세금부과에 반발, 다양한 혁명을 일으키면서 시민사회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 이외의 생산수단을 보유한 시민들이었기에 유산계급, 혹은 자본가라고 불리게 된다.

무산계급이라 불리는 프롤레타리아 (Proletirai) 는 독일어로, 라틴어인 자식 (Proles) 라는 말을 그 어원으로 하며, 자식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들, 즉 노동자 계급은 유산계급에 의한 착취로 러시아 혁명과 같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자본가 계급은 경제학적으로 생산의 2 요소라고 불리는 자본과 노동 중, 자본을 보유하고 있고, 이를 노동자 계급의 노동과 결합하여 자본소득을 창출해 왔다. 한정된 노동을 공급하여 얻을 수 있는 노동소득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 자본은 무한히 증가할 수 있으므로, 자본소득으로 그들의 자본을 더욱 축적시킬 수 있으며, 이론적으로 끝없이 증가할 수 있다.

반면 부르주아 혁명 이후이건 현재이건, 노동자는 유한한 자원, 즉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을 무한히 사용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24시간 이상 일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들을 고용하는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극대화 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임금을 지급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교환가치는 임금이며, 이 임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활비 및 양육비용과 기능 습득에 드는 비용을 합한 금액, 즉 노동자가 매일 건강하게 다시 일할 수 있는 상태로 육체적, 정신적인 재충전을 시켜줄 수 있을 정도의 필요한 금액이라고 표현한다. 생산활동으로 인한 이윤의 대부분은 자본가가 차지하고,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임금만을 지급받는 노동자들은 필요한 지출을 하고 나면, 여분의 금액을 모아서는 생전에 자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산의 필수 요소인 자본은 자본가와 노동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부르주아 혁명 이전의 귀족과 같은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계급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이 될 수 밖에 없었기에 새로운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끝없는 월요일 – 3화]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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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는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대기업을 다니는 아버지 밑에서 강남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지방의 유명 공대에 1997년 입학하여, 전기/전자/컴퓨터공학을 전공하였다. 물론 대학생활도 그다지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대학생 과외도 했으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 기간을 포함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2004년이었고, 졸업 전 취업 준비에 충실했던 그 친구는 누구나 부러워할 국내 굴지 대기업의 전자회사에 취업하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그 기간동안 그 친구는 결혼을 하였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다. 수 년전 그 친구가 결혼을 준비하면서 자금확보를 위해 이리저리로 발품을 팔던 때가 생각난다. 결혼식 비용, 전세자금 등을 마련하느라, 회사에서 직원에게 지원해주는 대출금 위주로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아직 미혼이었고, 약간의 저축이 있었던 필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 스스로 구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모자라게 된다면 긴급하게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었다. 믿는 친구이기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었고, 그럴 준비도 해놓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빠듯하게나마 스스로 모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필자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회사는 수도권에 있는지라 값 비싼 강남에는 그들의 보금자리를 틀 이유도 없었지만, 강남에 살만큼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대략 연 7천만원 정도의 수입으로 대출이자와 두 아이의 교육비, 그리고 생활비를 지출하고나면 저축할 수 있는 금액은 많지 않다. 78년생인 그 친구는 만 65세 이후에나 국민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하겠지만, 만 60세까지 근무하는 사람들은 주위에 거의 없다. 경쟁은 심하고, 임원자리는 부족한지라 임원까지 승진을 못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만 55세가 되기 전에 싫으나 좋으나 퇴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지만, 매일매일 출근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리고 그 이후에 필요한 자금마련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이 친구에게는 하고 있는 일을 관둘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 즉, 노동선택권이 없다.

필자의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고, 위 이야기 속의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리고 지금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보다 나은 주거 및 교육 등의 생활환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갖은 힘을 다하고, 저녁에는 거래처다 내부회식이다 술자리에서 몸을 상하거나 곧 다가올 프로젝트 마감을 위해 야근을 하는 것이 흔하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고사하고 가족을 위한 시간도 부족하다. 하지만 현실은 더 비참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벌어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관둘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여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부분이 정년 이전에 퇴사를 하게 된다면 심각한 경제적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아니, 정년까지 버텼다 하더라도 상황이 그다지 나아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지속해야 하는 필요조건이고, 그러기에 이러한 상황에 처한, 노동선택권을 보유하지 못한 우리에게 월요일은 끝없이 돌아온다.


[끝없는 월요일 – 2화] 현대사회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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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해 정복되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 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

– 극작가 리로이 존스 (LeRoi Jones), 1968년 뉴욕 할렘에서

 

얼마전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지만 요즘같은 세상에 참 가슴에 와 닿는 말인 것 같다.

얼마 전 한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다. 임원들과 같이 하는 회식자리에서 한 부장급 인사가 임원들과 대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임원이네 부장이네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X씨 집안 (오너 집안) 노비들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임원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노비? 노비라고? 당신이 노비급에나 끼겠어? 사장단이나 임원급은 되어야 노비 근처라도 가지, 당신들은 소나 말 정도 아니겠어?”

맞는 말인 듯 하다. 조선시대 노비들이라고 하면, 적어도 주인어른 얼굴이라도 본 적이 있을 것이고, 주인 댁 가족들도 얼굴보면 아 이 노비는 우리집 노비인 것 같은데? 정도는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일반 대기업 부장급 인사가 오너 집안 가족을 봤을 경우가 흔치 않으니, 오너 일가가 못 알아보는 그들은, 굳이 비교하자면 그들은 노비보다 못한 존재, 소나 말? 아니다. 주인 어르신은 말 얼굴도 자주 보시고 자신이 타던 말이 아니면 아니라는 사실도 인지하실 것이다. 소? 소도 큰 자산의 하나이므로 얼굴을 알아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도 닭?

부장이 저 정도라면 일반 사원들은 어떤가? 주인 댁 가족들이 부리는 그 노비가 부리는 그 밑의 존재… 낫이나 호미 정도의 아예 사물일 수도 있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인격적으로 모욕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너 집안의 눈에는 우리가 그 정도 하찮은 존재일 지 모른다는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죽어라 노력해서 대기업에 입사하고 난 후, 어디 그룹 직원이라 소속감을 뿌듯해하는, 그리고 내심 뽐내는 우리가… 따지고 보면 사실은 하나의 톱니바퀴 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 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자산을 불려주기 위해 일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받는 월급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소비로 대부분을 지출하고 있는 우리들이, 쇠사슬을 자랑하고, 스스로 노예임을 자랑하고 있는 리로이 존스의 글에 나온 노예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는 건, 필자만의 생각인가?


[끝없는 월요일 – 1화] 칼럼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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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어느 월요일, 필자가 살고 있는 홍콩의 미드레벨에서 출발해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근을 시작한다. 2주 간의 긴 휴가를 마치고, 회사가 있는 청콩센터(Cheung Kong Center)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월요일은 항상 마음이 무겁고 또 괴로우며, 특히 휴가 이후의 월요일이라면 더 그러할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로 보통 일요일 밤에는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꿈을 자주 꾼다. 기분도 꿀꿀한 상태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놈의 괴로운 월요일은 정말 앞으로도 끝 없이 오겠구나.’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월요일 출근길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몇몇 가혹하게 일을 시킨다고 소문난 대기업들은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이라고도 하던데, 그런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월요일이라고 특별히 더 힘들 것 같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주말은 그래도 쉴 수 있는 우리의 삶보다 훨씬 더 힘들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그 날 출근길에 건물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는 순간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월요일이 힘든 것은 대부분의 직장인의 비애일 것이다. 이런 괴로운 월요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은퇴하는 그날까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식들마저도 또 매주 월요일을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 ‘끝없는 월요일’이라는 본 칼럼의 제목은, 자기 사업이 아닌, 자기 회사가 아닌, 남의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그러한 서글픈 운명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의 아직은 미천한 인생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끝없는 월요일을 벗어나서 매일 금요일이나 토요일 같은 삶을 살기는 쉽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루지 못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포기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착실히 진행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고, 혹 우리 세대에서 못 이룩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세대에서라도 남의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일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칼럼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 “끝없는 월요일”이라는 칼럼은 매주 월요일, 필자가 수 개월, 아니 수 년에 걸쳐서 느낀, 왜 월급쟁이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일까? 혹은, 행복하지 못한 월급쟁이는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대해서 논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며, 필자가 명명한 노동선택권 (Labor Option) 에 대한 정의와 의의,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월급쟁이를 벗어나는 개념적 이해를 돕고자 시도할 것이다.

 


 

[군중의 힘] 크라우드 펀딩 (Crowdfunding) 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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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드 펀딩은 다향한 형태로 이루어 질 수 있는데, 크게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지분투자형 (Equity)

bitvore지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은 군중에 의해 기설립된 기업이나 새로이 설립될 기업의 자본금을 조달 하는 방식이다. 군중에 의한 자본금의 조달은, 기업공개 (Initial Public Offering) 과 마찬가지로 50인 이상의 공개모집을 해야 하기에, 증권사 라이센스가 없는 경우 금융규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자금조달 금액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 규모보다 작기에, 증권사 등이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국의 경우는, 2012년 JOBS Act (Jumbstart Our Business Startups Act) 로 소규모 기업들에 대해 각종 증권관련 규제를 완화시켜서 크라우드 펀딩이 더욱 활발해 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 (크라우드펀딩법)’을 통해 ‘온라인소액투자중개업’의 개념을 도입함에 따라 2016년 1월 부터 크라우드 펀딩 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될 예정이다.

 

  • 대출형 (Debt-based)

lendingclub대출 기반의 크라우드 펀딩은 2005년 영국의 조파 (Zopa) 가 그 시작이라고 한다.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이나 개인들은 온라인을 통해서 대출 신청을 하고, 대출자의 신용상태에 따라 신용위험과 금리가 결정되며, 투자자들은 개별 대출자나 대출자 집단에 대해 대출을 일으키는 펀드의 수익증권을 사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투자자는 원금과 이자를 획득하며, 크라우드 펀딩 운영자는 대출이자금액의 일부, 대출금액의 일부 혹은 서비스 수수료를 취득하게 된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2006년에 설립된 미국의 렌딩 클럽 (Lending Club)이 있으며, 렌딩 클럽은 2014년 12월 기업공개를 하여 기업가치가 약 90억 달러에 이르렀었다.

 

  • 선주문형 (Pre-purchase or Pre-order)

pebbleepaperwatch선주문형 크라우드 펀딩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서비스를 상품화하려는데 들어가는 비용, 음반이나 영화, 뮤지컬 등의 문화 컨텐츠의 제작을 위한 투자자금 들을 미리 상품, 서비스 이용권, 혹은 관람권 등을 판매하는 형태의 자금조달 방식이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생산되기 이전에, 미리 그 수요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출시 직후 매출로 곧바로 연결되는 장점이 있으며, 때때로 일반 출시 상품과 구별되는 한정판으로 보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 생산이 될 상품이나 서비스에 미리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으며, 또한 제품이 개발되는 도중에도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될 수도 있는, 소비자 중심적인 제품 및 서비스 개발이 가능하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는 페블 (Pebble) 의 E-Paper Watch가 있으며, 킥스타터 (Kickstarter) 를 통해 37일 만에 $10,266,845의 자금을 조달 받았다고 한다.

 

  • 리워드 교부형 (Rewards-based)

리워드 교부형 크라우드 펀딩은 자금조달자에게 대해 일정 보상을 해주는 형태이다. 보상의 방식은 다양할 수 있고, 이를 금전으로 하게 되면, 지분투자형이나 대출형, 제품이나 서비스를 보상해주는 경우에는 선주문형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금전이나 완성된 제품 혹은 서비스가 아닌 다른 형태로 보상해 주는 모든 형태의 크라우드 펀딩을 의미하며, 이는 기부형과 크라우드 펀딩과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보상보다는 투자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그 무언가로 보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앨범 후면의 Special Thanks To에 이름이 오르거나,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투자자의 이름이 포함되는 경우가 될 수도 있다.

 

  • 기부형 (Charity 혹은 Donation)

gofundme기부형 크라우드 펀딩은 순수 기부로 처리되며 자금조달자에게 금전적이나 다른 형태의 보상이 지급되지 않는다. 비영리 기업이 주로 자금조달을 기부형 크라우드 펀딩을 사용하겠지만, 반드시 비영리 기업이나 자선단체일 필요는 없다. 미국의 대표적인 플랫폼으로는 고 펀드 미 (GoFundMe), 유 캐어링 (YouCaring), 위 디드 잇 (WeDidIt)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소송형 (Litigation) 크라우드 펀딩처럼 소송 승소시 받게 되는 금액에 대한 지분 형태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으며, 다양한 기준에 따라 추가적인 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군중의 힘] 크라우드 펀딩 (Crowdfunding) 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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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드 펀딩의 역사에 대해서 조사해 보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예를 들면;

Mozart

크라우드 펀딩의 개념은 국제적으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17세기 유럽에서의 서적 발행을 위해 종종 사용되었었다. 서적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미리 출간되는 발행물을 선주문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구독 서비스이기도 했다.

또한, 크라우드 펀딩은 1700년 대에 음악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모차르트 (Mozart) 도 비엔나 콘서트 홀에서의 3번의 공연에 필요한 자금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였다.

The concept of crowdfunding has deep international roots, used frequently to finance book prints in Europe in the 17th century. Hopeful book purchasers were able to pre-order printed publications in advance—making it one of the world’s first subscription services as well.

Crowdfunding was also used in music as far back as the 1700s. Even the famous Mozart lacked sufficient funds to bankroll concerts, and used crowdfunding to raise money to hold three events at a Viennese concert hall.

출처: Forbes, “Crowdfunding Around the World”

Muhammad-Yunus-800x440크라우드 펀딩은 1700년 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의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는 지금의 마이크로 파이낸스 (Microfinance) 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를 시작했고, 아일랜드 전 지역에 걸쳐 저소득층 가족에 대출을 해주는 펀드를 시작하였다.

근대의 마이크로 파이낸스는 1976년의 유너스 박사 (Dr. Mohammad Yunus) 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일랜드의 스위프트와 마찬가지로, 유너스 박사는 저소득층의 개인들에게 은행으로부터 대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자신의 대학원생들의 도움으로 42인의 방글라데시 여성들에게 $27을 대출해주기 시작하였고, 이 대출을 받은 여성들은 그들의 사업을 시작하였었다. 7년에 걸친 수천번의 성공사례와 함께 유너스 박사의 대출 프로그램은 그라민 은행 (Grameen Bank) 가 되었다.

Crowdfunding can be traced as far back as the 1700s. An idea we now call Microfinancing, was started by Jonathan Swift in Ireland. Here, Swift began a fund that gave loans to low-income families throughout Ireland.

Modern microfinancing can be traced back to Dr. Mohammad Yunus in 1976. Similar to Swift, Yunus gave low-income individuals the chance at getting a loan from a bank. He began by loaning $27 to 42 women in Bangladesh where Yunus had help from his graduate students. These loans were used by the women to start their own businesses. Seven years and thousands of success stories later, Yunus loan program became Grameen Bank.

출처: Startup Valley (http://www.startupvalley.com/moreinfo/about-crowdfunding.htm)

statue of liberty_getty초기 크라우드 펀딩의 한 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자금 조달 업무를 맡은 미국 자유의 여신상 위원회가 약 삼분의 일 가량의 자금이 모자랐었고, 그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그로버 클리블랜드 (Grover Cleveland) 가 시 자금 사용을 거절하였기에 군중으로 부터 나머지 자금을 조달하였었다.

저명한 언론인인 조셉 플리쳐 (Joseph Pulitzer) 가 구원투수로 나섰고, 자신의 신문사인 뉴욕월드 (New Yorl World) 를 통해 자금조달 캠페인을 개최, 5개월 만에 어린 아이, 사업가, 거리 청소부, 정치인들을 포함한 16만명이 넘는 기부자들로 부터 $101,091 자금을 모집하였었다.

One early incidence of crowdfunding can be seen in one of the world’s most famous landmarks. The Statue of Liberty was partially funded by the crowd after the American Committee of the Statue of Liberty, who were tasked with raising the money for the statue, fell short by more than a third and the New York Governor Grover Cleveland rejected the use of city funds to pay for it.

The statue’s saviour came in the form of renowned publisher Joseph Pulitzer who decided to launch a fundraising campaign in his newspaper The New York World. In just five months The World raised $101,091, from more than 160,000 donors, including young children, businessmen, street cleaners and politicians.

출처: Virgin (http://www.virgin.com/entrepreneur/a-brief-history-of-crowdfunding)

Marillion최초의 성공적인 크라우드 펀딩의 사례는 1997년에 있었다. 영국의 한 락 밴드 (마릴리온, Marillion) 는 팬들로부터의 후원금을 통해 재결합 투어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 같은 혁신적인 자금조달 방식에 영감을 받아서, 아티스트쉐어 (ArtistShare) 가 2000년 대 최초의 전용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되었다.

The first recorded successful instance of crowdfunding occurred in 1997, when a British rock band funded their reunion tour through online donations from fans. Inspired by this innovative method of financing, ArtistShare became the first dedicated crowdfunding platform in 2000.

출처: FUNDABLE (https://www.fundable.com/crowdfunding101/history-of-crowdfunding)

이 중 어느 것이 정말 최초의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할 수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자유의 여신상이나 모차르트의 콘서트 기금 마련 등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크라우드 펀딩의 의미보다는, 모금의 성격이 더 강한 듯 하다. 이러한 모금운동까지 크라우드 펀딩의 역사에 포함을 시킨다면, 최초의 크라우드 펀딩은 인류 최초로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시점에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구세군의 자선 냄비나, 금모으기 운동,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당백전을 제조한 것 등 모든 것이 크라우드 펀딩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크라우드 펀딩, 즉 한 건 이상의 크라우드 펀딩만을 위한 단체나 조직이 설립된 것은 아티스트쉐어 (ArtistShare) 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티스트쉐어는 2003년에 설립되었고, 뒤를 이어 2005년 에퀴티넷 (EquityNet), 2006년 플레지 (Pledgie), 셀라밴드 (Sellaband), 2008년에 인디고고 (IndieGoGO) 등이 설립되면서 크라우드 펀딩이 활성화 되었다. 또한, 크라우드 펀딩 (Crowdfunding) 이란 단어는 2006년 8월, fundavlog의 마이클 설리반 (Michael Sullivan) 이란 사람에 의해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